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Ju 87 (문단 편집) == 활약상 == >유럽. 아프리카, 그리스, 발칸 반도, 러시아할 것 없이 히틀러의 마수가 미치는 곳은 어디든 이 무시무시한 폭격기가 선두에 나섰다. >---- >크롬웰 프로덕션 '2차 대전사', <독일 폭격기, 슈투카> 편 사실 초기형 슈투카는 실전배치 초기부터 퇴물 취급을 받았지만 실전 데뷔가 이뤄진 [[스페인 내전]]에서 사실상 시범적으로 파견한 슈투카 부대는 곧 전장에서 맹활약을 펼쳤고, 이 활약상에 크게 감명받은 [[독일 국방군|독일군]]은 아예 중형폭격기들이 주축이었던 폭격항공단(KG, Kampfgeschwader)와는 별개로 공격항공단과 급강하폭격항공단(SG, Schlachtgeschwader 그리고 StG, Sturzkampfgeschwader)를 창설한다. 다만 이 와중에 황당한 사고로 대량손실을 내기도 하였다[* 1939년 독일 공군 장성들 앞에서 26기의 슈투카가 시범 폭격을 보이기로 했는데, 안개가 껴서 지면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무리하게 급강하를 시도하다 고도회복에 실패하고 13기가 그대로 땅에 처박혀버리는 일이 있었다.]. 이후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 공군 최초로 적기를 격추하고 폭격을 수행했으며 [[노르웨이]] 침공, [[프랑스 침공]]에서도 주요 목표물들을 정밀 폭격으로 날려버렸다. 이 때의 급강하 폭격시 명중률은 거의 60%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두발 쏘면 한발 이상 명중시키는 수준이고 슈투카의 훈련 명중률은 95%라서 현대 유도폭탄의 실전 명중률보다 조금 낮고 무유도폭탄보다는 높은 수치다.[* 일본 해군도 실전에서 비슷한 명중률을 보였는데 같은 추축군인 일본군도 초창기의 급강하 폭격 명중률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진주만 공습 등에서 보여지듯 전쟁 초기 정지목표에 대한 명중률은 상당히 높았다. 다만, 전쟁 중반이후 베테랑 조종사들이 대부분 사망하고 기동 목표물이 늘어나자 폭격 명중률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례로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도 전쟁 후반에 적은 회고록을 보면 슈투카들의 명중률이 영 형편없다고 깐다. 오히려 포병이 진짜로 자신들에게는 도움이 되었다고.][* 사실 현대 무기와는 전장의 환경 자체가 달라져서 단순 비교는 별 의미가 없다. 현대전에서는 각종 대공 미사일과 전자전 장비 등으로 대응할 수단이 많은데 비해서 대전기에는 전투기로 요격하거나 대공포를 쏘는 것 말고는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교범상으로 급강하 폭격은 500m 고도에서 투하하지만 명중률을 높일 목적으로 더 낮게 내려가는 경우도 많았다. 미국의 경우 급강하 폭격기들이 급강하를 하고 나서 이탈할 때 일본 군함의 갑판보다 아래쪽으로 내려가있었다는 기록도 제법 있다고 한다.] 덕분에 개전 초반 독일군에게는 승전보를, 연합군에게는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 특히 노르웨이 전역에서 당대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영국 해군]] 함대가 [[크릭스마리네]] 함대는 어렵잖게 제압했지만 슈투카 때문에 후퇴할 수 밖에 없는 굴욕적인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슈투카 조종사들은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고 모든 독일군, 특히 육군의 사랑과 신뢰를 한몸에 받았다. 이에 대해서 독일 공군 야전원수 [[알베르트 케셀링]]은 '''"영국놈들은 우리들이 슈투카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슈투카를 두려워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